[생활칼럼/이해학목사생활칼럼] 인생의 굴곡을 배운 남원과 지리산

2024. 10. 18. 05:13이해학목사의 "건너는 사람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기운테였고”  인생의 굴곡을 배운 남원과 지리산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  (정의평화생명포럼 명예이사장)

 

 

 

 

 

어머니의 거듭되는 장사 실패와 빚에 쪼들리는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순창에서는 어려웠던 것들이 남원에서는 수월하였다. 학교, 친구 그리고 교회 등 모든 것이 나에게 관대하고 따스하였으며 꿈과 용기를 주었다. 나는 웅덩이에 고여있던 물이 홍수 후에 물꼬가 터져지듯 신이 나서 흘러가는 느낌과 그 물을 따라 내려가는 한 마리의 메기 같았다.

 

나는 남원에서 내 인생의 기지개를 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므로 학교생활도 점차 자신감이 솟았다. 처음에는 3등을 하고 다음에는 1등을 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교회 선배들이 원고도 써주고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책상을 멋지게 치는 제스쳐를 지도하여 준 것이다. 글짓기만은 나 혼자 하여 장원을 했다. 친구들이 나를 <노벨상 후보>라고 부르다가 그냥 <노벨상>이라고 하였다. “야! 노벨상! 어디 가냐?” 할 때, “야, 아이스케키!” 하는 것보다 기분이 괜찮았다.

 

태권도 수련을 받아 몸의 균형 잡기와 순발력을 키운 것은 평생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남원 법원에 근무하는 사범님이 참 훌륭한 지도자셨다. 무릎을 꿇리고 훈시할 때마다 “태권도는 잘못된 폭력과 무술(武術)에 맞서는 도(道)라고 강조하셨다.”

 

마침 그 무렵 학교에서 골치 아픈 친구가 있었다. 국회의원 동생인가 하는 양대우는 늘 친구들을 야비하게 괴롭혔다. 요즘 학교 폭력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이다. 어느 날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피하지 않고 응수해 주었다. 나를 가격하려 주먹을 뻗은 양대우를 발차기로 나가떨어지게 하였다. 그 뒤로 학교가 조용해졌다.

 

나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 써본 폭력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신혼 초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뺨 한번 때린 것과 목회할 때, 교회 수련회 안 간다고 억지 부리는 막내딸에게 대금이 부려지게 패 준 기억이 살아났다. 대금 연습을 하다가 집어치워 버렸다. 그때 나는 목회 우상화에 갇혀 있었다. 태권도 정신만도 못한 영성인 것 같다. ‘쏠라야, 미안하다...’

 

어머니와 내가 차금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작은 골방 주인은 초대 자치단체 정OO 도의원이었었다. 그 부인도 너그럽고 나에게는 다정하여 나의 사춘기를 이해해 주는 고마운 분이었는데 갑자기 전주로 이사를 가버렸다. 새 주인은 시장 입구에서 양조장을 하기에 늘 술에 취해 있는 허 씨 아저씨였다.

 

그분 부인은 평생 한복 짓는 일을 쉬지 않고 하시는 도인 같은 분이었다. 남원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아들 허무웅(경찰공무원으로 은퇴)과 나보다 한 학년 위인 허길웅은 내게 엿이나 곶감, 유과 등을 늘 나누어 주는(그 집 광은 먹을 것이 넘쳐서) 친구였다. 아깝게도 경찰공무원 초기에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초등학생인 허00은 아직도 중앙교회 뿌리로 남아 있다.

 

나는 한 집에 사는 무웅 형과 자주 앞산, 덕음산을 걸었다. 키가 껑정한 무웅 형은 자기 친동생인 길웅이 대신 나를 늘 데리고 다녔다. 우리는 덕음봉까지 다람쥐같이 오르기도 하고 시간이 있으면 금암봉 쪽으로 내려오기도 하였다.

 

가끔은 섶다리를 건너 주천면 육모정에 가서 쏟아지는 폭포 물소리 밑에서 악을 쓰는 기생들의 <목 따는> 광경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 지르기에 ‘목 딴다’고 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전국 명창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피나는 득음 훈련을 거쳐서 오늘날 남원의 국악이 이어져 왔으리라. 또 그들은 대게 우리집 건너편 박점동(후에 우리교회 초대 장로인)형 작은 방에 우글거리고 살았다.

 

역시 힘과 생기가 불끈 솟는 곳은 요천강변의 십수정이다

 

큰 나무가 열 그루가 자라기에 十樹停이라 하였다지만, 오랜 세월 하동에서 소금 배가 들어오는 뱃 터였다. 그러니 무역의 중심지였을 것 같다. 또 동학 좌도 김개남 군대의 훈련지라고 한다. 흰옷 입은 대열들이 물결처럼 오고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십수정은 남원의 힘깨나 쓰던 젊은이들이 다 모여 운동하던 곳이다. 크고 작은 역기를 들었고 나무 사이에 세워진 철봉과 평행봉을 서로 차지하려고 기다렸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링을 걸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 링을 매달고 운동까지 한 분이 노일룡 선배이었단다. 십수정에는 어깨에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노일룡, 김종순, 최형주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근육질을 자랑하고 건각을 키우는 힘이 솟아난 곳이다.

 

나는 형들이 운동할 때는 걸거치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하다가 끝난 뒤에 어느 때는 밤에도 와서 철봉에 매달려보며 몸 가꾸기에 눈을 떴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에 일찍 가서 평행봉 후리기를 십여 차례 흔들고 공부하곤 하였다. 그 덕에 후에 논산훈련소 입대하여 신체 검사받는 날 턱걸이를 18번 하여 그날 최고 기록으로 박수를 받았다.

 

 

천왕봉에는 ‘마고할매’ 상이 있다

 

‘마고할래’라 부르는 성모상은 언부테인지 모른다. 신래 박제상이 기록은 부도지(符都志)에 마고성(麻姑城)의 여신인 마고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박혁거세의 어머니라고 하거나 왕건의 어머니라고도 하여 봄가을 두 번 제를 올려 시조경모 풍습과 전래되었다.

 

그러나 지리산의 수난과 한만큼 고난의 세월을 겪었다. 고려 우왕 때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에서 외군에 크게 이겼을 때 패잔병들이 쫓기며 성 모상을 칼로 훼손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계곡으로 던저지기도 하였다. 내가 찬왕봉을 올랐던 79년까지는 분명히 있었는데 후에 행방이 모연하였으나 86년대에 천왕사로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지리산 등산팀이 짜여졌다. 모두가 고등학생인데 나만 중학교 2학년생이다.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며칠간 준비에 바빴다. 우리가 쓰는 장비 대부분은 군용이다. 카키색 옷을 검정으로 물들여 입었다. 항고, 코펠, 야전삽, 칼까지 군용이어서 전쟁 부스러기를 잘 활용한 편이다. 필수로 챙겨온 뻐터도 군용이다. 남원에는 없어서 광주까지 가서 사 왔다.

 

지리산 코스는 여러 곳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두 번이나 뱀사골에서 떠나 장터목 세석평지 대피소에서 자고 천왕봉을 둘러 뱀사골로 내려왔다. 나는 그 길만이 유일한 코스인 줄 알았다. 맨 마지막은 백무동에서 떠나 세석봉에서 자고 천왕봉 찍고 중산리로 내려왔다. 너무도 쉬었다. 그 급경사를 날아가듯 미끄러지며 달려왔기에 2시간 좀 더 걸렸다. 이렇게 빠른 길도 있구나. 다음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내가 지도자가 되어 익숙한 길로 안내하여 지리산을 올랐고, 내려가는 길은 중산리 급경사를 택하였다.

 

첫 번째 징역을 살고 나온 후 성남경찰서는 형사 한 분을 밀착 감시시켰다. 그분이 권길상 씨다. 그는 목욕탕에도 따라오고 딸아이 유치원길도 동행하여 그림자 같이 따르는 충성파였다. 한번은 그를 떼어놓으려고 고향 가서 조상묘에 성모 후 지리산을 가겠다고 했더니 거기까지 동행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형사 권길상과 함께 <적과의 동침>을 하듯 지리산을 탔다. 그때 노고단 대피소를 지키던 함태식 선생은 내 사정을 알고 다음에 피난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 하신 따뜻한 분이였다.

 

오랜 후에 내가 독일 통일 회담 후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기념으로 주민교회 청년들과 지리산 종주를 할 때는 아내 김영자 님도 같이하였다. 모든 것을 청년들 특히, 혜우와 연수 등이 주도하였다. 화엄사와 천은사에서 올라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오르고 반야봉, 토끼봉을 지나 천왕봉을 3박 4일 동안 종주하였다.

 

모든 곳에 상세한 이정표는 물론 곳곳에 편의점이 있어서 돈만 있으면 산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있었다. 더욱이 씩씩한 젊은이들이 보호를 해주니 너무 좋았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산행이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표현도 못 한 것 같아 미안하다.

 

잊지 못할 처음 산행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산에 오르면 최형주 대장이 산같이 보인다. 그때는 산행 이정표가 하나도 없었다. 지도도 없다. 오로지 대장 뒤꼭지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 대장인들 전문 산악인도 아니기에 가끔씩은 오판하여 헤매기 마련이다. 살림살이를 맡은 호윤 형은 모두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기에 식량 절약에 대해 잔소리하게 마련이었다. 특히 통조림을 적당히 분배시켜야 한다. 그들은 철저한 준비 끝에 지리산 종주 개척기에 해당하는 시대에 우리 일행을 3차례나 성공적으로 안내하였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등산도 처음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처음 산행은 쉽지 않았다. <반선>이라고 부르기도 한 뱀사골을 지날 때는 장쾌한 물소리가 등을 떠밀어주는 것 같았다. 갈수록 숨차고 땀나고 쉬었으면 하다가도, ‘저기까지만 가자’를 몇 번씩 수정하면서 계곡을 오르내렸다. 이정표가 없는 등산길을 몇 차례 놓쳐 헤매기도 하였다.

 

토끼봉을 지나면서부터 차가운 진눈깨비로 행보가 어려워졌다. 하산하자는 말이 나왔으나 전진도 후진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조난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불안했다. 8월 초, 산 아래는 염천으로 펄펄 끓는데 1,500미터가 넘는 정상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백설의 세계는 신비롭고 황홀하였지만, 우리는 눈이 덮인 길을 찾아 조심스럽게 걷느라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눈밭에서 사람을 부르고 찾으며 기다리는 일로 서로 지쳤으며 위험한 등반을 계속하느냐의 문제로 다투기까지 하였다. 결국은 중간에 합류한 세 명의 숙대생들이 “돌아간다니 말이 되느냐! 고산지역 눈보라는 지나가는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하여 선두와 후미에 체력이 좋은 사람을 세우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걷도록 하여 위기와 위험을 극복하였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깡패들 세 사람 와서 우리를 집적거렸다. 시빗거리가 아닌 시비가 벌어지고 결국은 폭력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모두 대장 형주 형에게 눈길을 묻을 때, 호윤 형이 나섰다. 그 호리호리한 체구로 그들에게 맞선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맞아 시빗거리는 피 흘리는 것으로 끝이 났고 그들은 떠났다.

 

나는 후에 호윤 형께 물었다. “왜 무모하게 그들에게 대들었냐?”고 호윤 형 대답을 듣고 나는 인생의 한 수를 배우는 듯하였다. 그들은 숙대생들이 우리 본 식구가 아닌 것을 알고 자기들 쪽으로 합류시키려 시비를 걸어온 것인데, 누군가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장이 맞붙겠나 해학이 네가 붙을래? 내가 맞아주어 판을 수습한 거야.” 나는 이것으로 이후의 호윤 형의 여러 실수에도 그를 용서를 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교회 팀 바로 남원중앙교회의 저력이었다.

 

 

무게를 아는 사람

 

우리는 여러번 뱀사골을 떠나 장터목, 세석평지, 대피소에서 잤지만 나는 지금도 장터목이 먼저인지 세석평지가 먼저인인 헷갈린다. 장터목은 오랜 세월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물물교환하는 장소였단다. 장터목 대피소에 지붕을 덮고 잠자리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함양, 중산리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서로 틈새를 나누어 하룻밤을 자야 한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추억만들기를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서로 흔들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세석봉에 이르는 길은 숲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으로 지은 수정 얼음 옷을 걸친 고사목들이 병사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곳곳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목이 우뚝우뚝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듯 서있다. 그로테스크한 신비, 수정처럼 반짝이는 얼음 옷이 만드는 환상으로 태초에 직면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의 전쟁과 탐욕이 핥으며 남긴 깊은 상처를 진주가 살 속에 박힌 모래를 진주로 만들 듯이 산은 상처를 보듬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보이는 세석봉을 지나 드디어 1,915m의 천왕봉에 올랐다. 백설로 눈부신 천왕봉은 태고의 바람으로 우리를 반겼다.

 

허나 산은 올라가 본 사람만이 그 무게를 안다. 산 정상에 서면 모든 것이 통째로 날아가고 새로운 기운이 통째로 안기는 것이 몸에 각인되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과정에서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통쾌함을 접한다. 두 번째 올랐을 때는 지리산(智異山)이라 쓰인 표지석에 둘러서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처음부터 보았다. 바로 그 밑에 조그마한 <마고할매 상>을 나는 세 번째 오른 59년에도 보았다. 그 뒤에 가보니 없어졌다. 인터넷에 뒤져보니 천왕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형들이 키도 작은 어린 꼬마를 데리고 갈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선물이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나를 도토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람쥐라고도 불렀다. 그 인연으로 내 생애에 지리산 천왕봉을 6번이나 오를 수 있었고 산을 그리워하는 습관이 들었기에 성남에서는 남한산성도 즐겼으리라. 산을 탈 때마다 뇌까린다. 산행이란 위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려가야 오르는 길이 있음을 배웠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이 내 몸에도 나를 키우기 위해 애쓴 선배들의 ‘기운테’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가 나 된 것은 선한 힘들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해학 (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대표/  정의평화생명포럼 명예이사장)

 

정의평화생명포럼 오시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