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날드 위니캇과 靈性

2023. 12. 17. 14:39심리학_상담학 이야기

도날드 위니캇과 영성

앤 율라노프 박사(뉴욕 유니온 신학교)
번역: 이재훈(한국심리치료연구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위니캇은 놀랍도록 단순한 문체로 사람들의 정신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1971년까지 우리 곁에서 살았던 영국의 분석가입니다. 그의 이론은 환상이 지닌 긍정적인 역할, 파괴성의 변형 그리고 우리의 창조적인 삶의 가능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론들과 구별됩니다. 그는 소아 정신과 의사로서 시작해서 어린아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분석한 사람들 중에는 아주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성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 세계에서 온 유명한 분석가들도 있었습니다.
분석가로서 위니캇의 창조성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가 프랑스에서 한 작은 소년을 면담할 때입니다. 불어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통역을 위해 다른 분석가더러 함께 있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분석가는 나중에 위니캇이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면담은 대기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소년은 옆에서 갑자기 마치 고양이처럼 냐옹하고 말을 거는 한 영국 할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이와 접촉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접촉이 이루어졌고, 아이는 즐거워하면서 자신의 환상 생활과 기억들을 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율라노프 2001년 134쪽 참조).

영성이란 우리 모두가 그 안에 거하고 있는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성령은 생명력, 동물적인 근원 충동과 관련되어 있는, 생명을 주는 자요, 취하는 자이며, 우리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고전 2:10, 히 4:12-13). 성령은 우리를 갈등을 가져오고, 낡은 확신을 깨뜨리고, 우리가 사는 방식과 목표의 수정을 강요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막강한 에너지인, 거룩의 현존으로 인도해 줍니다.

많은 임상가들은 영성을 종교와 구별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종교에 대해 나쁜 경험을 했기 때문이건 아니면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건, 종교가 그들의 삶을 제한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개인적 공헌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주는 보다 커다란 용어처럼 보이며, 규칙이나 정해진 행동과 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명상이든, 관상 기도든,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이든, 또는 불가지론이거나 무신론이든, 우리의 영적 입장은 우리의 임상 작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적 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고, 돈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듯이, 우리는 내담자들에게 우리의 영적 입장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영성은 분명코 우리가 피분석가들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 현존과 도덕적인 수준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력 또한 우리와 환자 사이의 전이-역전이에 특정한 영향을 끼치며, 우리더러 이 측면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영원한 진리의 상징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문화 안에서 지배적인 철학적 지향을 빌려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진리를 해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어거스틴은 플라토를, 틸리히는 실존주의를 사용했고, 같은 맥락에서 이재훈은 한의 실재를 해석하기 위해 한국 샤마니즘을 사용했습니다(이재훈 1994). 놀라운 사실은 인류가 새 천년을 맞이한 오늘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수행하는데 심층심리학이 가장 적절한 학문적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가들 중에서 프로이트와 융은 종교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고, 융은 종교를 다시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상징들에 투사했던 리비도가 풀려나게 되었고, 따라서 이전에 종교에 의해서 담겨졌던 정신 에너지가 인간의 정신 안으로 쏟아 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심층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위니캇의 심층심리학이 영성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는 역으로, 영성적 관점이 위니캇이 말하는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가?" 라는 우리의 주제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심층심리학과 영성이 두 개의 다른 전통이면서도 서구에서는 영혼의 돌봄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커다란 전통을 형성해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과 자기의 삶을 담아주는 그릇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간명한 기도가 이를 잘 요약해 줍니다: "나를 아는 것은 당신을 아는 것입니다"(율라노프, 2001, 125). 이십세기에 이르러 이 커다란 전통이 둘로 나뉘어졌고, 의식과 무의식, 본능과 감정의 측면에서 정신을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의사도 아니고 목사나 사제도 아닌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영혼을 돌보는 전문직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베텔하임 1982, 35). 융은 그의 분석심리학을 새로운 종교로서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상징들과 다시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무의식을 탐구하는 심층심리학은 종교적 삶과 그 연구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 전통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밤새 우리가 꾼 꿈에서건 낮 동안에 우리를 따라다니는 증상에서건,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우리의 뺨 위와 목 아래에서 숨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신비스런 무엇의 현존을 가리키는 그러한 경험들은, 특히 그것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와 우리 주변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초월의 경지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물론 무의식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더해 주었습니다.

심층심리학은 영성 생활에 구체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것은 영과 육체 사이의 갈등과 대화가 발생하는 장소를 우리 자신의 자기 안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호한 진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나 교리적인 논쟁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불화와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특정한 신앙에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면서도 우리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신앙 전통들을 수용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내전과 인종 학살과 빈부간의 거대한 격차를 통해서 끔찍스런 파괴성이 난무하는 와중에서 어떻게 영적 실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를 묻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담자들과 우리의 세계 안에 그처럼 많은 고통이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종류의 영적 삶이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영성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특정한 삶을 향해 부르시고 그 삶을 받아주시는, 그리고 우리의 심리치료 면담에서 항상 함께 해주시는 이 신비한 저자에 대해 명상하게 함으로써 심층심리학을 위해 기여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이 저자에 대해 지적으로 아는 것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말없이 그리고 합리성을 뛰어넘어 이 고요하고 완전한, 그리고 우리 심장의 고동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심장이 멎은 후에도 거기에 계시는, 이 신비한 현존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십니다.

특히 위니캇을 논의함에 있어서, 저는 그의 이론을 영성 또는 영성 실천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과 영성은 서로 다른 목적과 언어들을 가진 두 개의 독립적인 학문 전통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심층심리학의 주요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인 접근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마치 창조적인 작곡가처럼, 그는 성과 공격성과 창조적 삶에 관한 주제들에서 신선한 변형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 존재의 능력과 행위의 능력

성 정체성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고 아직도 여성들이 동등하게 일하고 교육받고 선거하고 보수 받고 승진하고 존중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이 시대에, 위니캇은 성에 관한 독창적인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존재와 행위라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속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개념은 우리의 성격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융의 개념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융의 아니마(자아와 자기 사이를 연결하는 심리적 교량) 개념에 대해 말하면서, 아니마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는 나의 일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위니캇의 신선한 접근은 우리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환상이 지닌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그의 강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그가 중간 공간이라고 부른,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유아의 삶 속에 있는 공간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유아는 점차로 절대 의존 상태에서 상대 의존을 거쳐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다 자기와 타자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더합니다. 우리는 환상을 믿음으로써 즉, 우리가 어린 시절 애지중지하는 장난감이나 담요가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이 공간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첫 번째 상징으로서 심리적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우리의 자기감을 확장시켜주는 것입니다. 곰 인형이나 담요 또는 인형 등의 중간 대상은 돌보아주는 사람을 상징하며, 동시에 우리가 이 소중한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발견하고 창조하는 자기감을 상징합니다.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침범하지도 않고 방치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의존을 신뢰할만한 돌봄으로 받아주고 허용해주고 응해주는 엄마(친 엄마, 할머니, 아버지, 손위 형제, 보모일 수도 있는)에게 의존하는 우리의 경험에 기초해 있습니다.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초기에 확립되며 우리의 신체 안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느낌을 갖고 세상 안의 대상들을 만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자를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하나된 존재로 느낍니다.

위니캇은 주로 유아가 그의 엄마와 갖는 경험에 대해 말합니다. 저는 그러한 상호 하나됨의 상태가 우리가 창조적인 사고, 새로운 사랑 관계, 상실했던 우리 자신의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 초월적인 것과의 새로운 영적 연결 등을 경험할 때에도 발생한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때 우리는 타자와 하나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자아는 잠재력의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이 실제로 피어나는 것은 타자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존재하는 상태에 머무릅니다. 많은 영적 수행자들 또한 이러한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노력합니다.

유아를 안아주고 돌보아주고 음식, 장난감, 목욕, 잠에서 깨우기, 잠재우기 등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현실을 제공해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처음에 우리는 타자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때 타자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들, 안아주기 또는 떨어뜨리기, 잘 돌보기 또는 학대하기, 현실을 아기가 감당할 수 있게 조금씩 제공하기 또는 너무 커다란 소음으로 아기를 침범하기 등은 우리의 미래 정신 건강과 질병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의존의 이미지를 확장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 창조적인 생각, 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초기 관계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영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체화하기 위해 부모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적 삶의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듯이, 우리의 영성이 튼튼하게 자라나 우리의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할 때까지, 자신의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의존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우리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구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것이며 황량한 느낌만을 전해줍니다.

심리치료에서 치료자는 그것을 치료 과정이 내담자의 상처 깊은 곳에 도달할 때 내담자와의 사이에 발생하는 정서를 통해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이 분위기는 이름없는, 말없는, 희망없는 슬픔이 젖어들게 됩니다. 또는 후회, 불안, 분노, 공허감, 미움, 심지어 증오와 같은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압축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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