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9. 15:43ㆍ심리학_상담학 이야기
현대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다.
인종, 계급, 성별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든 충분히 교육받고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기회를 부여받고 있으며, 개인의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여성이라고 교육의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하는 경우는 드물며, 여성도 당연히 교육을 받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여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도록 요구된다.
어떠한 직업을 선택하든 그 직업을 가지게 될 때까지 여성이 들인 노력, 자아실현의 측면, 자녀의 엄청난 사교육비, 배우자로부터의 독립의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결혼을 했다고 하여 일을 그만두기도 쉽지 않다. 결혼을 할 때까지 잠시 거쳐 갈 직장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며 능력도 인정받고 성취감을 느끼려면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는 현대남성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고등학교, 아니 요즘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학교와 학원을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입시스트레스와 취업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지내다 보면 정체성은 없어지고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일만 하면서 사는 일벌레가 되거나 무력감과 불안, 허무감에 짓눌리게 된다. 그런 스트레스 하에서 현대사회에서 흔한 정신질환인 우울증, 공황장애, 강박장애가 생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사회는 개인의 능력만 있으면 다른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인종, 성, 사회경제적 신분의 차이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고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아직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차별은 은폐되거나 무시되고 개인의 능력에 의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겉모습을 포장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개인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행복하지 못한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무능력과 나태함, 노력부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무력감과 자신감 저하, 좌절감은 더욱 심해진다.
여성의 경우, 이러한 상황이 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해마다 유엔이 발표하는 여성권한지수에서 세계 80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취업과 인사에서의 차별, 육아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필자가 잘 아는 분야인 의사들의 사회만 봐도, 레지던트를 뽑을 때 학과 성적이나 인턴 평가 점수와는 상관없이 ‘여자는 뽑지 않는다’고 말하는 과가 버젓이 존재하며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면접점수에서 차별을 두는 경우가 많다. 레지던트 때에 출산을 하게 되면 한달도 채 못 쉬고 출근하여 출산휴가 동안 서지 못한 당직근무를 위해 몰아서 당직을 서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전공의들이 법정출산휴가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후에 육아에 대한 부담은 대부분 엄마에게 돌아간다. 아빠가 일이 바빠서 가족과 지낼 시간이 없는 것은 정당화되지만, 엄마가 일이 바빠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모성애를 저버리고 사랑받지 못한 아이를 키워내서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전업주부인 경우에도 아이에게 혹 문제라도 생기면 ‘집에서 하는 일도 없이 아이 하나 제대로 못 키운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그 시간에 아빠와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받고 자라나서 남성에 비해 뒤지지 않는 교육을 받고 목표와 의욕과 자신감을 가지고 사회에 나왔던 여성은 그야말로 이상과 현실의 모순에 부딪혀 분노하고 상처받고 병들게 된다. 여성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정신질환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여성에서 남성보다 두배 더 흔하게 나타난다. 우울증의 평생 유병율은 여성의 경우 10-25%, 남성의 경우 5-12%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잘 우울증에 이환되는 원인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보다 남녀 유병율의 차이를 과장되어 보이게 만드는 요인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감이나 불안 등의 정서적인 증상에 더 민감하고, 동등한 증상을 가졌을 때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더 잘 병원에 내원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나서인지, 여성보다는 스스로의 약한 모습-우울증-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남성의 경우는 우울증이 우울증 자체보다 알코올 중독이나 반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적인 요인으로는 유전적인 요인과 여성호르몬의 영향이 있다. 우울증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서 유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질환이지만, 여성이 더 잘 우울증에 이환되는데 유전적인 요인이 관여하는지, 혹은 어떠한 기전에 의해 관여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울증의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여성호르몬의 역할은 좀 더 잘 밝혀져 있는 편이다. 성호르몬은 우울증의 발병 및 유지, 치료기전에 관여하고 있는 중추신경계의 신경전달물질, 신경내분비계, 신경조절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에스트라디올과 프로게스테론은 우울증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의 합성과 대사, 분해에 영향을 준다. 여성호르몬이 우울증에 관여한다는 간접적인 증거로 산후우울증과 월경전기 증후군의 존재를 들 수 있다.
‘Postpartum blues'라고 불리는 심하지 않은 우울감은 산후 여성의 50-80%에서 경험하는 매우 흔한 현상이다. 우울감, 슬픈 기분, 과민성, 불안, 두려움, 두통, 피로 등을 경험하며, 대개 출산 후 2주 이내에 시작되어 수 일 이내에 회복된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농도의 급작스러운 변화와 연관이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출산과정에 겪는 두려움과 수치감, 기쁨 등의 복합적인 감정과 육아에 대한 부담이 영향을 준다.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한 산후 우울증은 산모의 10-15%에서 나타난다. 산후 우울증은 그전에 우울증을 앓은 병력이 있는 경우에 발병하기 쉬우며, 그 외에 부부 사이 혹은 시댁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 영아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때,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을 경우, 사회적인 지지가 부족한 경우가 위험요인이 된다.
월경전기 증후군은 월경주기 중 배란기부터 월경 시작 전까지의 특정 시기에 우울 기분, 신경질과 짜증, 폭식 등 다양한 기분, 행동의 변화와 두통, 여드름, 유방의 통증, 요통 등의 신체적 증상이 시작되었다가, 월경이 시작되면 대개 일주일 이내에 사라지는 패턴이 월경주기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월경주기의 특정시기에만 증상이 나타나므로 여성호르몬의 변화가 증상의 발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울증의 발병에 여성호르몬이 관여한다는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은 ‘여성은 여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우울증에 취약하고 사회생활이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테스토스테론이 높은 남성은 화합하지 못하고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직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둘 다 옳지 않다. 또한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 주로 여성들이 받는 차별과 스트레스에 대해 중점을 두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경험하는 생존경쟁사회에서의 불안, 두려움, 좌절, 스트레스, 가족을 부양하여야 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무시하거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여성의 입장과 시각을 좀 더 강조하여 논의를 풀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여성에서 더 우울증이 많은 사회적 요인으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물려받아온 불리한 사회적 여건을 들 수 있다.
여성은 경제적, 법적, 사회적인 차별에 대면하고 있으며 그러한 차별로 인하여 목표에 도달하기가 어렵고 우울증에 걸리기가 쉽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우울증 발병율은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가장 큰 대조를 보이는 가임기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여성의 결혼과 그로 인한 역할의 변화, 출산, 육아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 우울증의 빠른 발견과 적절한 치료도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차별을 없애고 결혼과 육아에서의 스트레스와 부담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의 변화와 여러 가지 제도적 개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외에, 여성의 정신건강에서 빠뜨려서는 안되는 부분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관한 것이다. 여성에 대한 대부분의 신체적, 성적 폭력은 애인이나 남편, 그 외의 가족, 혹은 알고 지내는 사람에 의해 행해진다. 폭력은 살인에서부터 폭행, 강간, 근친강간, 아동학대, 부인학대, 노인학대, 애인학대 등을 포함한다.
대검찰정 범죄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성폭력 발생건수는 1980년에 3,977건, 1990년에 5,519건, 그리고 1996년에 5,688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히 신고율이 약 6.1%로 이에 근거하여 실제 발생 건수를 추산해 보면 한해에 약 25만 여건의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연구에 의하면, 성인여성의 20%, 청소년기 소녀의 12%는 성적인 학대와 위협을 경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캐나다의 연구에서는 인터뷰에 응답한 여성의 51%가 16세 이후로 한 번 이상의 신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하였다고 답하였다. 남성 여덟 명 중 한 명은 그의 애인이나 부인에게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이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이 흔하게 나타나는 사회적 원인은 문화적인 기대치와 가족의 구조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사적인 소유물로 여겨져 왔으며 소유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폭력은 용인되었다. 부부 사이의 강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많은 남성 가해자의 동기는 성적인 소유권, 우월과 조정에 관련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고 가해자가 안전할 수 있는 가정의 구조와 사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회의 태도는 공격성이 반복되는 것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성은 초기에는 쇼크, 멍해짐, 사회적 철퇴, 부인 등의 반응을 보인다. 폭력의 장기적인 결과로 광범위한 정신과적 질환과 증상이 생길 수 있다. 만성적인 우울감과 무력감, 무망감이 흔하며 타인을 신뢰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안과 공포, 회피 행동이 생기고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는 느낌, 죄책감, 자기 비난, 자살 사고, 외상 후스트레스장애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폭력이 발생하였을 경우 적극적인 대처-내과, 외과, 부인과, 정신과적인 진찰과 진료, 법적인 대응-가 필요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성적인 대상, 지배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는 남성중심적인 사고의 변화 및 여성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좀 더 적극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의 사회진출 및 지위향상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여성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확대되어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의 다른 점에 대해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서로의 짐을 들어주며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김지연(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심리학_상담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려와 지지... 그리고 (0) | 2023.11.15 |
---|---|
정신분석이란 (0) | 2022.08.10 |
연예인 우울증 80% 경험, 왜? (1) | 2022.08.09 |
프로이트 - 리비도 는 대상관계를 목적한다 (0) | 2022.08.09 |
⊙ 섹스 중독 판별을 위한 자가진단법 (0) | 2022.08.09 |